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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운문 문학의 흐름 (2/4)

by 넛츠맘 2024. 4. 18.

2. 중고

중고 문학(中古文學)은 시기적으로는 794년의 헤이안 천도에서 1192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가마쿠라 막부를 개설할 때까지의 400년간의 일본문학을 가리킨다. 즉 정치 문화의 중심이 헤이안에 있던 400년간으로, 헤이안 문학 혹은 왕조 문학이라고도 한다.

먼저 헤이안 천도가 율령제 재건을 목적으로 이루어졌듯이 이 시대를 이해하는 출발점은 정치체제의 변화에 대한 인식에 있다. 바로 천황 친정의 율령제에서 후지와라 씨를 중심으로한 섭관체제로의 이행을 주시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을 경제적인 변화로 설명한다면 율령제의 근간인 공지공민제에서 장원으로의 변화를 말하는 것으로, 장원을 경제적인 바탕으로 후지와라 씨 중심의 섭관체제가 구축되었다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럼 문학과 섭관체제라는 정치적 구조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한다면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헤이안시대의 섭관체제는 천황의 외척인 귀족이 중심이 되어 문화를 향유하였기 때문이다. 단지 귀족문학이라고 하지 않고 왕조문학이라 부르는 연유는 천황을 둘러싼 궁중의 후궁을 무대로 이루어졌으며, 왕권이라는 논리가 기능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섭관 체제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대한 기본 지식이 반드시 요구된다. 섭관이란 천황이 어릴 때 정무를 대신하는 섭정과 천황이 성인이 되고 나서 후견인의 역할을 하는 관백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 시대에는 천황의 외척이 이 지위를 독차지하게 되었다. 즉 권력가는 자신의 딸을 천황에게 시집보내고서 태어난 외손자를 다음 천황으로 즉위시키고 천황의 외조부로서 권력을 휘둘렀던 것이다. 물론 외삼촌들도 포함하여 권력의 중심에서 이른바 외척정치를 하는 형태를 섭관정치라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따라서 권력을 유지하기위해서는 반드시 자신의 딸이 왕자를 낳아야 함으로 천황의 총애를 받아야만 하였다. 천황의 총애를 받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다른 천황의 부인들과 비교해서 뛰어난 문화 살롱을 형성하는 것이었다. 바로 후궁의 문화 살롱을 말하는 것으로 문화적인 공간을 만들어 가는데는 지적이고 교양있는 참모들을 필요로 하는데 그들이 바로 뇨보(女房)라고 할 수가 있다. 뇨보는 우리들 궁중문화에서 설명하면 궁녀의 의미가 되는데, 후궁의 지적인 참모역할을 담당하는 뇨보는 괘 높은 신분의 상궁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러한 뇨보를 민간에서 발탁하여 후궁으로 보내는 역할은 물론 후궁의 아버지와 오빠 혹은 남동생이었다. 그렇게 권력가에 의해서 발탁된 지적인 여인들은 뇨보로 궁중에 들어가 후궁들의 가까이에서 지적인 참모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데, 가장 중요한 조건은 와카에 대한 교양으로 어떠한 경우라도 센스있고 품위있게 상대의 와카에 대답해야만 했다. 그러한 교양으로 자신이 모시는 후궁 살롱 문화의 세련되고 우수함을 궁중의 귀족들에게 알려야만 했던 것이다.

궁중의 많은 귀족들 사이의 평판으로 후궁의 가치는 증대되고 물론 궁중 귀족의 중심에 위치하는 천황의 총애를 받게 되어 친정 집안의 권력을 강화시켜 나가는 것이었다. 이러한 섭관정치의 시작은 요시후사에서부터이나 그 절정기를 이룬 것은 바로 미치나가였다.

먼저 헤이안 400년간을 100년을 단위로 해서 살펴보면,

헤이안 초 9세기는 이른바 국풍암흑의 시대로 율령제 재건을 목적으로 대륙문화가 성행되던 시기이다. 정치나 문학만이 아니라 일상에까지 대륙 문화가 영향을 미치던 시기로 문학에서는 한시문이 융성하던 시기이다. 바로 이전 시대의 만요슈에서 보이던 와카의 기운이 쇠퇴하였던 시기였다.

10세기는 대륙문화 수입이 단절되고 나서 일본문화가 꽃피기 시작한 시기로 고킨슈가 그 상징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가 있다. 공적인 자리에서 밀려났던 와카가 다시 공적인 표현 수단으로 격상되었는데, 이전의 만요슈의 대장부스러운 가풍과는 달리 이지적이고 우아한 가풍을 지니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만요슈와 고킨슈의 이러한 가풍의 차이는 바로 9세기의 대륙문화 융성에 따른 한시문의 영향이라고 할 수가 있다. 즉 솔직하고 꾸밈없이 노래를 읊던 만요시대의 와카가 한시문의 관념성의 영향으로 보다 지적이고 우아한 노래를 중심으로 하는 고킨슈의 와카가 태어나게 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와카의 전통 위에서 11세기는 여류가 주체가 된 산문 문학이 꽃핀 시기라고 할 수가 있다. 바로 일기문학과 모노가타리문학의 시대인 것이다. 특히 헤이안 산문문학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모노가타리는 10세기 말부터 시작된 일기문학의 영향을 받은 허구적인 이야기를 중심으로 하는 문학 작품으로 후궁문화 살롱의 실제 주역인 뇨보들이 바로 창작의 주체가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후 섭관체제가 약화되어 가면서 12세기는 왕조문학이 쇠퇴해 나간다.세력을 확대시켜나가던 무사들 중심의 세상에서 헤이안 귀족들은 이전의 찬란했던 왕조 문화의 잔영을 와카등의 문학의 세계에서 명맥만 유지시켜나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구문화와 새문화의 대립의 상황을 배경으로 역사와 모노가타리의 영역을 넘나드는 역사모노가타리가 만들어진 시기이기도 하다.

 

2.1 와카와 가요

와카는 서정시로 집단의 정서를 표출하는 가요와는 달리 개인의 내면적인 심정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한 형식의 와카를 모은 가장 오래된 가집인『만요슈』의 편찬에서 중고의 대표적인 가집인『고킨슈(905)』의 편찬 사이에는 100년간이라는 시간의 차이가 보인다. 앞서 말한 '국풍암흑의 시기'를 가리키는데, 중요한 것은 대륙문화의 융성으로 인한 두 가집의 가풍에서 보이는 단층이다.

즉『만요슈』의 와카가 순간의 감동을 꾸밈없이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과는 달리 『고킨슈』의 와카는 실제의 대상에 대한 순간의 감동을 그대로 표출하는 것이 아니라 작자의 관념으로 재구성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감정 표현은 여러 가지 기교를 필요로 하게 되면서 이지적인 가풍을 형성하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관념의 도입이라는 점에서 두 가집사이의 대륙문화 융성 즉 한시문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고 하겠다.

특히 『고킨슈』가 천황의 명령으로 편찬된 칙찬집이었다는 사실은 『만요슈』이후 쇠퇴하던 와카가 다시 공적인 언어 수단으로 격상되었음을 의미하는데, 편찬의 의도는 '가나 서문'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와카는 궁중 귀족만이 아니라 이후 일반 귀족의 일상의 의사 전달의 수단으로까지 확대되어 가는데, 『고킨슈』의 섬세하고 세련된 가풍은 그러한 왕조 귀족의 취미에 부합하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시간의 추이를 명확하게 인식한 와카의 배열에서 나타나는 헤이안 귀족의 자연관과 인생관등은 당시만이 아니라 현재까지 일본시가 문하의 규범으로 강한 규범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최초의 칙찬집인 『고킨슈』가 편찬되고 나서 중세의『신고킨슈』에 이르기까지 '하치다이슈(八代集)'이라고 불리우는 칙찬집이 편찬된다. 각 칙찬집은 편찬되는 시기의 시대적인 분위기를 알려 주는 중요한 자료가 되는데, 예를 들면 4대 칙찬집인『고슈이슈』를 통해서 일본 와카사의 전환기의 양상을 알 수 있다. 즉 와카를 공적인 연대감을 형성하는 공동체의 수단으로서 보다는 서정시 본연의 사적인 표현의 도구로 인식하는 경향이 명확해져 간다. 이러한 와카사의 신풍, 새 기운은 미나모토노 쓰네노부와 아들 도시요리에 의해서 확립되어, 중세의 와카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한편 헤이안 시대의 가요로는 전기에는「가구라우타」「사이바라」가, 후반에는「이마요」등이 성행하였다. 「가구라우타」「사이바라」는 민간의 민요가 궁중의 의례에 사용된 것이며, 후기에 유행하던「이마요」의 방대한 양의 가사는 애호가인 고시라카와 법황이 편찬한 『료진히쇼』에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