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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운문 문학의 흐름 (3/4)

by 넛츠맘 2024. 4. 18.

3. 중세

중세문학은 12세기말의 가마쿠라(鎌倉)막부 성립(1192)에서부터 17세기 초의 에도(江戶)막부 개설(1603)까지의 약 400년간이다. 그런데 이 시기는 정치의 중심이 어디에 있었느냐에 따라서 다시 가마쿠라시대, 남북조시대, 무로마치시대, 전국시대로 나눌 수 있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와카문학에는 제8대 칙찬집인 『신코킨와카슈(新古今和歌集)』는 운문 문학사적으로 중고시대에서 중세시대를 이어주며, 한편으로는 새로운 가풍을 구현하여 왕조 와카와는 색채가 다른 신풍 와카의 시대를 가져오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칙찬집이다. 『신고킨와카슈』이후 중세를 통틀어 칙찬집은 13개의 가집이 편찬이 되었는데, 무로마치 시대에 별반 특징이 없는 21번째 칙찬집이 편찬된 이후, 운문문학에서의 권위 있는 자리를『렌가』한테 물려주게 된다. 처음에는 귀족들이나 무사들의 유흥의 문학이었던 『렌가』가 궁정에서 와카와 같은 권위를 인정받게 된다. 하지만 너무 많은 규칙이나 규율 등에 의하여 매너리즘에 빠져 본래에 가지고 있던 해학적인 재미가 없어지자, 이를 대신하여『하이카이렌가』가 생겨난다.

정리하자면, 중세시대는 계속된 전란으로 인해 귀족계급이 점차 몰락해가는 데 비해 상대적으로 무사계급이 대두하고 서민사회가 성장해가는 전환기였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와 함께 운문문학도 와카에서 렌가로, 렌가에서 다시 해학적이고 서민적인 하이카이 렌가로 중심축이 이동을 하여, 그 후 에도시대에는 다시 하이카이 렌가에서 변화한 하이카이가 서민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문학의 형태로 정착되어 갔다.

 

3.1 중세의 운문 문학

중세시대에 들어와서도 초기에는 전 시대 말에 성행했던 우타아와세(歌合)가 여전히 개최된다. 우타아와세는 좌·우 두편으로 갈라 노래의 대결을 벌이고 한자(判者)라는 심판이 우열을 가리는 일종의 노래 시합으로 헤이안시대 말기에 성행했다. 이 유행은 중세 초기까지 남아있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센고햐쿠반우타아와세(千五百番歌合)』와 『롯퍄쿠반우타아와세(六百番歌合)』이다.

여덟번째 칙찬와카집이 바로 『신코킨와카슈(新古今和歌集)』이다. 『신코킨와카슈』는 중고와 중세의 과도기적 위치에 있는 작품집으로 헤이안의 귀족문화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새로운 무가문화적인 요소를 같이 가지고 있다.수사법으로는 조코토바(序詞:어떤 말을 이끌기 위해 앞에 붙이는 말), 엔고(緣語:한 작품 안에서 관련성 있는 표현들을 다양하게 도입하는 기법), 가케코토바(掛詞:한 어휘에 두개 이상의 의미를 가진 동음이의어를 구사하여 내용을 보다 더 복잡하게 표현하려는 기법), 혼카도리(本歌取り:이전에 나온 와카의 표현을 빌려 와서 보다 더 새로운 작품세계를 창출해 내는 기법), 쇼쿠기레(初句切れ:5·7·5·7·7의 첫구를 끊어주는 기법), 산쿠기레(三句切れ:5·7·5·7·7의 5·7·5에서 끊어주는 기법), 다이겐도메(體言止め:와카의 끝을 체언으로 끝맺는 기법)등의 다양한 기법을 구사하고 있다. 이런 다양한 표현기법을 통해 지금까지의 와카들과는 달리 표현구조가 다층구조로 되어 있고 이런 기법들을 통해 몽환적인 작품세계를 그려내고 있다.

『신코킨와카슈』이후 와카는 명맥은 유지되나 질적인 면에서 『신코킨와카슈』를 능가하는 작품이나 작품집을 만들기는 어려웠던 것 같다.『신코킨와카슈』를 이어 칙찬집(勅撰集)으로는 『신초쿠센와카슈(新勅撰和歌集)』가 만들어 진다. 『신초쿠센와카슈』이후 칙찬집은 10수년에서 20년 정도의 간격으로 계속 엮어지고 있지만 대부분이 『신코킨와카슈』의 수준에는 현격히 미치지 못한다. 후지와라테이카가 죽은 후 그의 아들인 후자와라타메이에(藤原爲家)가 아버지의 대를 이어 가단의 지도자가 된다. 후지와라타메이에가 죽자 이번에는 그의 자식들 간에 서로의 정통성을 주장하며 가단(歌壇)은 니조(二條)파, 교고쿠(京極)파, 레이제이(冷泉)파의 세파로 분열하게 된다. 명목상으로는 와카의 정통성을 위한 싸움이라지만 실제로는 정치적·경제적 문제를 둘러싼 세력다툼이었다. 이 세 파의 대표가인은 니조타메요(二條爲世:1250∼1338), 교고쿠타메카네(京極爲兼:1254∼1332), 레이제이타메스케(冷泉爲相:1263∼1328)이다. 이들을 중심으로 서로가 천왕을 중심으로 자기들이 편찬한 칙찬집이 정통하다고 다투다보니 노래의 질보다는 그냥 작품의 숫자를 채우는데 급급하게 되고, 그 결과 노래의 질은 떨어지게 된다. 숫자적으로 『신코킨와카슈』이후에 칙찬집이 13개나 만들어지지만 와카의 전성기라 하지 않고 와카의 침체기라고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도 『교쿠요와카슈(玉葉和歌集)』와 『후가와카슈(風雅和歌集)』는 중세와카의 특징을 보여주는 칙찬집이라 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와카의 침체기와 가단의 분열을 계기로 무사와 서민들 사이에는 자기들의 취향에 맞는 새로운 시가 형태인 렌가(連歌)가 성행하게 된다.

렌가(連歌)의 매력은 제일 첫구인 홋쿠(發句)를 제외하고는 앞의 구에 구를 붙여서 하나의 작품 세계를 만들게 되지만, 뒤에 다른 구가 붙게 되면 원래의 구와는 전혀 예상치 않은 또 다른 작품세계가 전개되는 형식으로 작품세계가 머물러 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해간다는데 있다. 그 나름대로의 질서와 규칙이 있는데 이것을 시키모쿠(式目)라고 한다. 시키모쿠가 대충 정비된 것도 고토바인 시대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학식있는 사람이 등장하여 렌가를 권장하고 렌가의 문학적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하게 됩니다.

니조요시모토는 최초의 렌가작품집인 『쓰쿠바슈(토玖波集)』를 엮었고, 렌가의 이론서인 『쓰쿠바몬도(筑波問答)』와 시키모쿠를 정리한 『오안신시키(應安新式)』을 남겨, 렌가를 하나의 당당한 문학으로 대성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니조요시모토를 이어 이마카와료슌(今川了俊:1326∼?), 본토(梵燈:1349∼1427?), 소제이(宗체:?∼1455), 신케이(心敬:1406∼1475) 등이 활약했는데, 이 중에서 신케이는 쇼테쓰(正徹)의 가론(歌論)을 이어받아 『사사메고토(ささめごと)』 등의 여러 렌가 이론서를 남기고 렌가의 예술성을 높이는데 힘을 썼다.

신케이를 이어 렌가를 혁신하여 크게 완성시킨 사람이 소기(宗祇:1421∼1502)이다. 소기는 때마침 오닌의 난을 전후하여 전국의 유력한 무사들의 비호하에 전국을 순회하며 렌가를 지도하는 렌가시(連歌師)로서의 활약상이 돋보이는 사람이다다. 소기는 렌가의 이론 및 실제 작품활동에도 눈부신 업적을 남기고 있으며 또한 렌가를 계몽교육하는 분야에서도 크게 활약을 했기 때문에 명실상부한 렌가의 대성자라 할 수 있다. 소기는 니조요시모토 이후의 좋은 작품들을 모아 『신센쓰쿠바슈(新撰토玖波集)』를 편찬했다.

소기의 렌가 작품집 중에서 특히 자기 제자 소초(宗長:1448∼1532), 쇼하쿠(肖柏:1443∼1527)와 같이 엮은 『미나세산긴햐큐인(水無瀨三吟百韻)』이 제일 유명하다.

렌가의 제일 처음 구인 권두구, 즉 홋쿠(發句)는 독립된 시의 형태로 읊어져 나중에 하이카이(俳諧)로 발전되어 가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는 점에서도 그 가치가 인정되는 바이다. 이런 정통한 렌가는 쇠퇴되기 시작했으나 반대로 시키모쿠에 구애받지않고 자유롭고 해학적인 내용의 하이카이렌가(俳諧連歌)가 유행하게 됩니다. 야마자키소칸(山崎宗鑑:생몰미상)은 하이카이렌가를 모은 『신센이누쓰쿠바슈(新撰犬筑波集)』를 남기고 이후 에도시대의 하이카이 문학을 낳는데 산파역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