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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운문 문학의 흐름 (4/4)

by 넛츠맘 2024. 4. 18.

4. 근세

에도 시대는 전란이 없는 평화로운 시대였다. 안으로는 도쿠가와 막부의 산킨코타이와 같은 철저한 지방 통제 정책으로 사회는 안정되어 있었고, 밖으로는 쇄국정책을 펼쳐 조선의 통신사와 나가사키 항을 제외한 모든 통로를 차단했다. 이러한 상황은 교토·오사카·에도와 같은 도시의 발달로 이어지고, 서민들의 경제활동을 용이하게 하여 경제력을 가진 도시 서민을 중심으로 가부키 죠루리 같은 서민의 문화가 번성하게 하는 작용을 하게 되었다.

막번체제로 중앙집권을 이루고 지배계급의 이념으로 유학을 받아들여 교육시킨 도쿠가와 막부는 사회의 안정을 이루게 되었고, 각 지방의 번주인 다이묘 들은 막부가 지방의 군사력 증강을 억제하려는 정책으로 어려워진 경제력을 키우기 위해 간척사업 등으로 농지를 넓히고 특산물을 개발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또 육로와 해로의 개척을 통해 지방의 산물이 대도시인 오사카를 중계지로 하여 전국으로 유통되게 되었다. 따라서 대도시의 서민들은 생계를 위해 자연히 문맹에서 벗어나게 되고 부의 축적으로 문화적인 생활을 하게 되었으며 문학과 예능 등에서 서민들 만의 통속적인 미의식을 창출해 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적인 기운은 에도시대 중기를 기점으로 교토나 오사카를 중심으로 한 가미가타 중심에서 서서히 에도 중심으로 옮아가게 된다. 무사들의 정치도시인 에도가 문화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가미가타에 버금가는 도시로 성장했다는 점과 근대도시인 동경의 기반을 갖추어 가고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기도 하다.

 

4.1 운문문학

근세의 운문은 지배 계급과 서민 계급이 서로 다른 운문의 세계를 향유했다고 할 수 있다.

우선 근세 초기에는 테이몬·단린·쇼후로 일컬어지는 세 유파의 하이카이가 차례로 번성했었다. 각각 언어유희와 서민정서, 또 예술적인 경지의 개척으로 대변할 수 있는 전기 하이카이는 쇼후 하이카이를 개척한 바쇼에 의해서 여기로만 취급되던 하이카이로부터 서민의 정서에 의하면서도 미적 세계를 추구하는 예술로 승화되었다. 바쇼는 하이카이를 통하여 사비·와비·가루미 등의 미의식을 표현해 내고 많은 제자들을 지도하는 등의 활약으로 하이카이의 절정기를 이끌어 낸다. 하지만 그의 사후에는 제자들이 바쇼의 세계에 대한 엇갈린 이해와 주장으로 하이카이는 쇄퇴하게 된다.

다시 중흥기를 맞이한 것은 텐메이 기로서 대표적인 사람으로 부손을 들 수 있다. 화가였던 부손의 회화적인 표현 방법은 낭만적인 하이카이의 세계를 보여 주었고 바쇼 사후의 침체된 하이카이의 세계에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부손의 사후, 서민의 오락적인 놀이의 성격이 짙어진 하이카이는 에도 시대 말기까지 그 통속성을 벗어버리지 못한다.

분카·분세이 기에 들어서 유일하게 고바야시 잇사가 돋보였다.

그는 속어와 방언을 자유분방하게 사용하여 인간미 넘치는 서민의 생활 감정을 하이카이로 읊었는데 유희적인 하이카이가 지배하던 에도 말기에 이러한 그의 활약으로 하이카이는 간신히 문학적인 성과의 명맥을 이어간 것이다. 하이카이는 메이지 시대를 맞이하여 현재의 가장 짧은 시가인 하이쿠로 변화한다.

센류는 하이카이에 풍자나 골계 또는 폭로적인 내용을 포함시킨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시가인 하이카이의 여러 규제나 약속으로부터 자유롭게 세태와 인정에 대해 경묘한 표현을 추구하는 시가이다. 이에 비해 교카는 전통적인 시가인 와카의 형식을 취하되 속어를 사용하여 패러디와 같은 수법으로 전통 와카를 이용하여 기지와 골계를 무기로 읊는다.

 

5. 근현대

일본문학에서 근대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메이지유신(明治雄新: 1868) 이후를 말한다.

메이지 유신으로 막부(幕府) 체제의 무인정권은 붕괴되고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근대시민사회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변화 속에 일본은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여 국가의 발전을 꾀하였다.

이와 같은 시대적 상황은 종래의 문학 형태인 와카나 하이카이에도 영향을 끼쳐 시대적 흐름에 영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으며, 시가의 새로운 형태로 근대시가 탄생하게 되었다.

 

5.1 시

일본근대시의 역사는 100년이 넘는데, 신체시라는 장르를 개척한 『신체시조(新体詩抄,1882)』에 의해 시작되었다. 모리오가이(森鴎外:1862~1922)등의 번역시집『모습(於母影,1889)』에 의해 서정의 분야를 열었고, 청일전쟁 이후에 시마자키 도손(島崎 藤村:1872~1943)의 『봄나물집(,1897)』에 의해 낭만시로 결실을 맺었다.

메이지시대 말기에서 다이쇼시대 초기에 걸쳐서 현실이나 인산의 추함을 폭로하는 자연주의에 대항하여, 허구 속에 관능적이고 향락적인 미를 추구하는 탐미파의 시가 유행하였다. 탐미파 시는, 문어로 쓰여졌지만 5·7·5·7·7의 단가나, 5·7·5의 하이쿠에 대하여 비정형시로서 문어자유시를 가리킨다.

다이쇼시대(大正時代:1912~1926)에 들어서자, 이상주의와 인도주의를 주장하는 시라카바파(白樺派)의 영향을 받은 다카무라 고타로는 『도정(道程,1914)』을 통하여 인도주의적 정신에 토대를 둔 시를 노래하여 구어자유시를 정착시켰다.쇼와시대(昭和時代:1924~1989)에 들어서자, 나카노 시게하루 등에 의하여 프롤레타리아 시가 쓰여졌고 이어서 모더니즘 시가 쓰여졌고, 태평양전쟁이 끝나 패전후의 황폐한 상황에서 살아갈 길을 모색하였던 아유카와 노부노, 다무라 류이치등은 『황무지(荒地)』라는 동인지에서 활약하였고, 카토 슈이치 등은 서구의 상징시를 모델로 삼아 압운(押韻)을 이용한 정형시를 쓸 것을 주장하는 마치네 포에틱(マチネ・ポエテイック)운동을 전개하였다.

 

5.2 단카

1880년대 말, 구태의연한 전통적인 와카에 대한 반성으로 새로운 방향을 향한 모색이 일어났는데, 오치아이 나오부미가 단카의 결사단체 아사카사를 결성하여, 와카의 혁신적 향상을 위하여 계몽적 역할을 하였다.

아사카사 출신인 요사노 뎃칸은 1899년 단카의 근대화를 시도하여 낭만주의를 주장하면서 단카의 결사단체 신시사(新詩社)를 결성하고, 다음해 기관지로서 잡지『명성(明星)』을 창간하였는데, 주요인물은 요사노 아키코, 이시카와 다쿠보쿠 등이 있다.

다이쇼시대에는 독자적 가풍을 확립한 단카 작가도 등장하였고, 쇼와시대 초기에는 프롤레타리아 단카가, 태평양 끝난 이후에는 전쟁 체험을 토대로 한 단카가, 각 시대를 배경으로 만들어 졌다.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 전반까지는 실험적 수법에 의한 전위 단카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지만 주목할 만한 결과는 없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서서 다와라 마치의 『샐러드 기념일(サラダ記念日,1987)』은 새로운 감각의 작품 내용과 그 세계가 화제를 불러일으켜 침체되고 있던 단카에 대한 관심을 끌게 하였다.

 

5.3 하이쿠

1800년대 말경 마사오카 시키는 근세시대 이후 계승된 하이카이가 진부하고 참신한 맛이 없다고 평하며, 그 명칭도 하이쿠라고 명명하여 하이카이를 혁신하려는 운동을 시작하였다.

시키는 회화적이고 낭만적인 가풍으로 객관적 세계를 노래하였던 근세시대 하이쿠 작가 요사부손을 재평가하여 대상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는 사생하이쿠를 제창하였다. 시키 문하에서 다카하마 교시, 가와히가시 헤키고토등과 같은 뛰어난 하이쿠 작가가 배출되고, 1897년 하이쿠 잡지『호토토기스』가 창간되었다.

 

쇼와시대에 들어서자, 꽃과 새라고 하는 자연과 그것들에 얽힌 인간 사회와 생활을 그저 무심하게 객관적으로 노래하는 것이 하이쿠의 본질이라고 하여, 하이쿠 작법의 이념으로 화조풍영(花鳥諷詠)을 주장하는 다카하마교시가 중심적 역할을 하는 『호토토기스』에서 멀어지는 작가도 나타났다. 각각 스스로가 이상으로 삼는 하이쿠를 목포로 하였고 근대인의 자아를 통해서 파악된 인간의 전체성을 하이쿠에 표현하려고 하여 인간탐구파라고 불렸다.

 

태평양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46년 구와바라 다케오는 일분문화를 비판하는 한 부분으로 하이쿠의 존재가치와 그 가능성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제2예술론』이라는 문학론을 통하여 주장하였는데, 이 주장에 대하여 하이쿠 작가들의 거센 반론이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하이쿠에 위기감을 초래하여 사상성과 사회성을 지향하는 기폭제가 되어 패전 후의 하이쿠를 다양화하는 계기가 되었다.